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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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 파울 첼란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밤 내 노트북의 커서가 반짝일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가 바라보던 강물의 깊이와 그 강물이 흘러가 기르던 밤하늘의 화분에 담긴 별들을 생각한다 아무르 강을 내 오랜 기타처럼 연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슬픔은 검푸른 빛깔이어서 내 기타의 노래 소리 아득히 밤하늘의 별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슬픔들이 마르면 나무들의 영혼이 됨을 이제야 알겠다 목관악기의 가을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이제야 나는 조금 알겠다 자작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며 대지의 오랜친구들을 부를 때 삶은 현기증 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바람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의 위안 속에 잠길 수도 있다는 거, 이제사 알겠다 흠 있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이 지상의 거처, 흠 없는 영혼..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 이하(李賀)의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철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단편들' 세계사, 1997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하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는 아침에 나는 가까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푸른 맨발을 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침의 가깝고도 먼 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여 너는 지난밤 무거운 공기들의 외투를 벗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나고 있구나 정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너를 드러내 보이는 이 순결한 아침의 햇살 속에서 사월의 투명한 대기는 참혹한 기쁨에 옴몸을 떨고 나의 불면은 아무 것도 노래할 수 없구나 그리고 내오랜 그리움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흙들의 사랑은 함부로 꽃들을 피워올리고 있다 보이는 곳의 사랑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구나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깊은 사랑을 하는 온갖 나무들이여 저마다의 격렬한 희망을 표명하며 흘러가는 오 짐승이여 강물이여 너희들이 흘러가서는 마치 최초의 기쁨으로 스며드는 오,..
살구나무가 등을 살짝 굽힌 채 큰길 너머 사잇길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비켜서지 못한 바람이 울컥 치미는 향기를 쥐여주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깐 마음이 휘청거렸지만 아쉬움이 묻은 얼굴을 파란 하늘에게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오래 걸었던 풍경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고 익숙해진 인연도 여기까지라고 몸을 돌려 뒤돌아갔다 동백꽃이 툭 툭, 죽비를 치며 떨어지는 날이었다 '시와문화' 2023년 여름호
태안에서 당진을 잇는 한적한 지방도를 지나던 승용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려서는 갓길 좌판에서 수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와 흥정을 시작했는데, 할머니 이 수박 얼마예요 올해 날이 궂어서유 아니 이 수박 얼마냐고요 긍께 품이 많이 들어서유 그러니까 얼마 드리면 되냐고요 대충 줘유 서울 사람이 잘 알겄쥬 촌것이 알간디유 만 원 드리면 될까요 냅둬유 소나 갖다 멕이게 서울서도 만 원이면 살 수 있는데요 그럼 서울서 사지 여까지 왜 왔슈 그러지 마시고 좀 깎아주면 안 돼요 서울깍쟁이 서울깍쟁이 하더만 진짜구만유 그럼 이만 원에 세 개는 어때요 싸게라도 많이 파는 게 좋잖아요 냅둬유 썩어지면 거름이나 주지유 머 그 여자, 결국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 내 엿 내가 만들어 파는 것이니 엿 값은 엿장수 맘이라..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볼 때 그녀가 싫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아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볼 때면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는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끊어지는 것들을 꿰고는 했다 미동 없이 한참을 꿰다가 잠에 들어가던 그녀가 말했다 지금 들리는 음악이 좋아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가 싫었다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으니까 잠에 든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방 한칸이야 더는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짙고도 푸른 작은 방 * 쳇 베이커의 노래.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창비, 2022
나이지리아에서 왔어 나이는 몰라 사장님이 그러는데 내가 한국에 온 지 삼십 년 됐대 아빠는 부인이 다섯이야 엄마는 둘째 부인이나 셋째 부인일 거야 나한테 뽀뽀를 잘 해줬어 근데 난 넷째 부인을 닮은 것 같아 일 끝나면 공장사람들은 다들 고향 얘기를 해 그럴 때면 나도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혼자 가만히 있을 때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아 고향을 생각하면 이상해 내가 아는 고향과 진짜 고향이 다르면 어떡해? 내가 아는 바로 그 고향에 갔는데 기쁘지 않으면 어떡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어리고 나만 혼자 늙었을지도 몰라 난 멀리 와서 매일 일을 해 이젠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아졌을 거야 고향에는 일자리가 없어 사람들은 낮에도 자거나 술을 마셔 가족을 괴롭히면서 ..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읽을 수 없는 시는 아름답다 어느 계절의 여행처럼 시는 휴일도 없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럽다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매일, 매일 매일 문 너머 풍경은 여전히 일상인데 시는 읽을 수 없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눈과 입을 꿰맨 향기로운 시체를 안고 천 년을 살았다는 어느 왕처럼 나는 아침마다 시를 받고 계단을 내려가 마른 꽃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시는 휴일도 없이' 걷는사람, 2020년
아는 길을 잊어버렸다 알던 얼굴을 잊어버렸다 늙은 시간을 재고 또 안다고 알고 있다고 말한 골목이 눈물처럼 차올랐다 어디 가시는데요 가는 걸 잊어버렸다 베너낸 길이 생살처럼 저렸다 늙은 시인의 얼굴이 달그림자 같던 밤 말을 걸었다 아는 얼굴, 알고 있는 맛 피할 수 없는 골목을 알고 있다 끄덕였다 잊은 내 의지를 더 강한 바람이 흔들었다 또 그 골목이었다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시선, 2021년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세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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