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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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보험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를 이십 년 만에 만나 술 먹고 노래방 가서 불러 젖히고 돌아온 집 들목, 북진하는 단풍이 보인다 어인 물감이냐 차창 위 층층 너의 바지 아랫단이 얌전히 눌린 꽃잎이, 혹시 간밤 빗물에 총총 뛰놀다 떨어진 참으로 참했던 침묵이냐 빗물은 하늘을 내려빗기는 반가운 손님이란 걸 아니 잊었더냐 함향, 2022
그건 정말이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잠들도록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일이야 늦은 여름 아침에 누워 새벽을 홀딱 적신 뒤에야 스르르 잠들고자 할 때 너의 소원대로 스르르 잠들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저 먼 곳에서 너는 잠깐 잊어버리고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너를 잠들게 하는 것이라는 걸 멀리서 너의 이마를 아주 오래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게 좋겠지 창작과 비평, 2022
절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 바람 가는 쪽으로 몰려간다 천도제 끝난 봄날이다 처마밑 틈새로 새가 들어가자 울음이 쏟아진다 생사의 길에 구르는 명랑 슬플 것도 기쁠 일도 아닌 듯 검은 소복 여인의 치맛자락에 민들레 꽃씨가 날린다 죽음은 멀리 가는 것 가서 돌아오지 않는 바람처럼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내안의 울음을 다독일 때 지는 꽃잎에도 눈물이 난다 천도를 건너는 그대 눈물자국만 흥건하다 가끔 사는 게 뭐냐고 물었지만 구름은 먼 산 넘어가고 하루도 저물어 서쪽엔 노을이 든다 다음에 올게요 산문을 나서는데 다음이라는 말이 기약 없이 화두처럼 따라온다 절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 바람을 따라간다 달아실, 2023
고요히 앓던 어린 마음이 순하게 떠나려나보다. 분명 문제가 있었어. 혼자 돌아다니는 게 수상쩍었어. 그 눈빛이 단감, 단감 하루에 딱 한 시간 누렇게 바랜 한자 많은 옛날 책 갈피 새 누웠다 간다. 다 읽지도 못하고 이상한 마음이었어. 밤에 자꾸 나가게 하는 달리게 하는 어둠 속에서 물러가는 그건,뿌리. 아무도 안 봐. 단감, 단감 갈래갈래 갈라지는 하나의 목소리. 툭하면 굵은 가지도 부러트려주었던 억센 나무야, 착하다. 고맙다. 이제 그만 놓아줘. 단감, 단감 부서진 조각을 묻어도 부드럽고 둥근 불꽃으로 다시 자라나. 내게 올래? 나를 지켜줄래? 전부 다 잊어버릴래? 너를 쪼아먹을까? 너를 말려 먹을까? 단감, 단감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와. 오늘 나는 글자를 다 잊었어. 까악까악 울고 있어 내 뱃속엔..
월요일에 겨울비가 내렸다 딱 오늘만 내리기로 했다 남색 우산에 검정 꽃무늬 원피스 노란 우산에 네이비 도톰 원피스 땡땡이 민트 우산에 와인 니트 원피스 빗줄기를 세어보기로 했다 열밖에 외울 줄 모르는 아이처럼 현관을 나가면 사람을 잊을 수 있도록 거리에 사람들이 한 손을 흔든다 나머지 한 손에는 벗은 원피스가 월요일을 생각하고 생일로 조합한 비밀번호를 떠올리고 나는 월요일을 좋아하고, 비를 좋아한다, 그것도 월요일에 내리는 겨울비 열까지 세어보고 눈을 떠보니 현관문 뚫린 열쇠 구멍으로 꽉 들어찬 물음표가 보였다 달아실, 2023
아스팔트 틈에서 내게 묻는 민들레 꽃 사는 게 힘들다고 쉽게 말하는데 너 진짜 힘겨워 본 적 있어? 심심한책방, 2023년
큰일났다 잠이 달아났다 새벽 세 시가 되어가는데 잠이 달아났다 어디에도 고 놈이 보이지 않는다 눈 감고 누워 기다려도 고 놈은 감감 무소식 대체 왜 그랬을까 어제 낮에 너무 한가했나 아니면 혹시 나이를 먹어 잠이 없어진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초저녁 잠도 안 잤는데 목욕도 갔다 왔는데 저녁도 적당히 먹었는데 큰일이다 잠이 도망갔다 마루 밑 생쥐가 물고 갔나 누렁개가 낼름 먹어 치웠나 심심한책방, 2023년
오늘 점심엔 국수나 마실까 먼저 물 팔팔 끓이고 누런 국수를 살살 풀어야지 푸르륵 한 번 끓으면 찬물 반 컵 붓고 또 다시 푸르륵 끓으면 찬물 반 컵 더 붓지 국숫발이 말갛게 되면 찬물에 헹궈 식히고는 그제 남긴 깍두기 국물에 참기름 댓방울 떨궈야지 깨소금 반 숟갈 뿌리고는 맛나게 마실라네 후르륵 한 젓가락 마시면 삼분지 일이 사라지고 후르럭 또 한 젓가락에 또 삼분지 일이 줄어들테니 내 이럴 줄 알았으니 국수는 두어 줌 나마 삶아야지 오늘 점심엔 국수나 마셔야겠어 이것 저것 필요치 않고 시원한 물김치나 한 국자 붓고는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얼음이나 두어 알 얹어 놓고는 심심한책방, 2023년
나는 아프다는데 너는 바쁘다 하고 나는 털어놓고 싶은데 너는 시간 없다 하고 그래서 볼 수 없구 들을 수도 없다 하니 이게 뭐야 우리 친구라며 심심한책방, 2023년
시들어 마른 주황색 장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정신 차리고 살아 지는 거 금방이야 서늘한 바람 불면 금방 겨울이야 심심한책방, 2023
좋은 글 쓰고 싶으면 일단 써 놓고 읽고 고치고 읽고 고치고 또 읽고 또 고치고 그러다가 맘에 들면 일단은 내겐 좋은 글 다시 남에게 읽히고 다시 고쳐서는 읽히고 고치고 읽히고 고치고 또 읽히고 또 고치고 그러다가 다른 이 맘에도 들면 비로소 자타공인 좋은 글 심심한책방, 2023년
가끔 혼자 운다. 혼자 겪어야 할 몫을 그때 안다. 멜라니 사프카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은 당신과 헤어지는 일이라네. 그래, 나도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 때로 이미자의 황포 돛대를 타고 서해 바다 언저리를 헤맨다. 혼자 있을 때,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고, 분노를 분노라고 말한다. 절벽처럼 혼자일 때, 당신이 보인다. 천년의 시작,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