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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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나의 화첩에서 사라진 봄을 찾아내는 것은 오랜 습관 ​꽃잎들을 찾다가 시계를 잃어버리고 새순을 찾느라 물감을 잃어버리고 하늘을 찾다가 초록을 놓치고 ​지쳐서 나는, 나비 혼자서 나비 노래도 없이, 식목일 ​빈 화분들이 빗줄기를 두들겨 맞고 있는 만화경萬華鏡 ​봄만 남기고 다 봄 이름만 남고 다 뜯겨진 봄 '봄만 남기고 다 봄' 달아실, 2023
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어긋난 딱 두 개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버리면 그만 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사랑은 당신에 대한 나의 기대고, 집은 당신을 위한 나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그래서 일이다. 당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일이고, 당신을 위해 차를 우리는 일이며, 당신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다. 일 없는 사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과 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슬픈 풍경이다. 산골에 홀로 버려진 채 조용히 낡아가고 있는 집들은 얼마나 쓸쓸한 풍경인가. 빈집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 같이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얼굴도 우리를 애잔하게 한다. 사랑이 항상 누구와의 일이라면 집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그 사랑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듯이, 집을 위한 집은 있을 수 없다. 집에는 항상 당신이 있어..
아주 오래전에 고드름처럼 자라는 열매가 있었다, 그건 잠든 시인을 안고 있는 애인의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 불현듯 시인의 정수리로 뚝뚝 떨어질 뾰족한 운석, 시인이 한숨 많은 애인을 끌어안자 가슴 가득, 울음 참는 들숨처럼 스며드는 한숨의 애인, 오늘도 시인은 애인에게 보여줄 시를 썼다, 시를 받아든 시인의 애인은 한숨을 폭 쉰다, 이 시는 당장 읽지 않으면 금세 녹아서 사라져버리겠지, 두 손이 부재의 기억으로 끈적이고, 기도를 멈출 수 없게 완전히 달라붙어버리겠지, 시인의 애인은 시인을 먼저 살다 간 사람, 시인이 이제 살다 갈 사람, 한달 전에도 백년 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은 여기 있다, 오늘도 시인의 애인은 시인의 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창밖에는 막대사탕같이 꽂힌 세상 모든 꽃송이..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감정이 생기고 제목도 모르면서 새로운 거짓말이 되고 싶다 겨울 끝에서 내 처음의 꽃이 떼로 몰려온다는 것 꽃이 돌멩이처럼 잊었던 기억을 찍어내고 무더기 무더기 떼로 몰려온다는 것 꽃은 구름이 가득한 동쪽으로 가는 길이랬어 잘 아는 꽃이었어 알다가도 실금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붉은 벽돌 같은 것 미지근한 어떤 기억과 방향이 생기는 게 그 꽃 같았어 깊은 밤 파랄수록 무수히 돋아나던 별들이 맹렬하게 반짝인다 아무리 그 개처럼 크게 울어도 반짝여지는 이 무한한 뭇별의 고요함은 밤인지 봄인지 꽃인지 무채색 구름인지 죽음인지 대답이 뒤섞인다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갑자기 누구의 꽃이 될까 비명이 될까 흐를까 무릎으로 남아 있을까 우르르 일어나는 것을 발로 차 보고 있다 '해바라기밭의 리..
달빛 아래 벌레 한 마리 잠들었다 먹던 나뭇잎 반장 내일 먹으려 남겨 두고 달빛 이불 덮었다 저 눈부신 애잔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2017년
사라지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다고 했다. 아름답자고, 추악해지자고, 자유와 자유의 실패 속에서 자란다고도, 죽는다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도. 인간의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한 손에는 모래 한줌, 한 손에는 온 우주를 쥐고 똑바로 걸어가는 거라고도 했다. 꽃을 샀다가 서둘러 탄 막차 속에서 망가져버렸다. 차마 버리지 못했다. 등뒤로 감추고 돌아왔는데 이런 예쁜 꽃다발을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아주 오래도록,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어떤 균형으로만 위태롭게 서서 만나게 되는 무언가. 찰나에 마주서서 가만히 웃거나 우는, 어쩌면 그게 내가 하는 전부와 하고 싶은 전부가 아닐까,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르고 아주 가끔씩만 희망도 절망도 아닐 수 있..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이 손등을 지나갑니다 이 바람이 지금 봄바람 맞지요? 라고 문자를 보낼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 당신에게 줄 이 바람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이 말이 그 말 맞네요 차를 타고 가다 어느 마을에 살구꽃이 피어 있으면 차에서 내려 살구꽃을 바라보다 가게요 산 위에는 아직 별이 지지 않았습니다 이맘때 나는 저 별을 보며 신을 신는답니다 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손에 닿겠지요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다음 토요일 만나면 당신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이 바람이 그 바람 맞네요, 하며 날 보고 웃겠지요 '모두가 첫날처럼' 문학동네, 2023년
여기 아직 사람 있어요 중학생 때, 불 꺼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면 오래도록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나 기다려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퇴근하는 길 사람으로 가득한 차량 이제 와서 외치거나 하지는 않지 사람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러나 열차가 어둠 속을 달릴 때 차창에 비치는 얼굴들 왜 다 웃고 있는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