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어긋난 딱 두 개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버리면 그만 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작과 비평, 2009년
이선영 - 짧고도 길어야 할,
○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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