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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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깊도록 걸어도 발등으로 번지는 물결무늬 바람 소리에 쓰러져 누워 그물망에 스스로 묶이는 너는 바다가 아니라 너는 바람이 아니라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 아기 발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 울음 가늘게 떠도는 습자지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 걸어 나올 수 없는 푸른 얼룩 시인동네, 2023
원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혼자서 잠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 한 사람은 약속을 따르는 것처럼 원산으로 가는 열차는 가득 차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로든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이 쏟아진다 창밖에는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깨어나면 낯선 이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원산으로 가요 거기서 살아요 창문이 덜컹이는 방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이 천장을 가리키면 한 사람이 천장을 보는 것처럼 깨어나면 또 다른 이가 옆에 앉아 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플랫폼에는 이불을 닮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 저기 저 열차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같지 이불은 차고 베개는 낮고 어느새 나타난 역무원이 호각을 불어 새들이 멀리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원산행 열차에 올라 잠이 들었다. 민음사, 2020
넘어져서 무릎을 다치고 난 뒤 무릎을 편애하기 시작했다 무릇 무릎이라 하면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픈 무릎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무르팍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불쑥 솟아난 돌의 미간 서걱거리는 잎을 달고 꼼짝 않고 서 있던 마가목 나동그라진다 나는 엎어져서 깨진 무릎을 들여다 본다 찌륵거리며 건너온다 그만 저곳으로 갔던 게 아니다 아직 마가목은 파르스름 흠칠대는 기류를 흘려보내고 있다 귀뚜라미 수염 같은 가슬가슬한 귀뚫이의 마가목 가지는 하나도 헐거워지지 않았다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철제 난간에 저를 뻗어 걸치고 있다 무릎이 무릇 무르팍이 되기까지 콱 힘주어 일어서기까지 문학동네, 2016
아직 덜 폈어요 오지 마요 문학동네, 2020
낑깡을 얼마나 크게 한 입 베어 물어야 얼떨결에 슬픔도 삼켜질까요 그리고 어찌해야 그 슬픔은 자신이 먹혀버린 줄 모를까요 노을이 추운지 희끗희끗 몸을 떠네요 떠는 건 진심이지요 겨울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요 생각으로는 어찌 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횡설수설하며 걷다보면 횡설수설을 들려주고 싶은 집 앞에 도착하지요 집 앞에 서니 집이 참 멀어 보입니다 진심이란, 집 안에 없고 내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집이 여전히 멉니다 진심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지만 집은 그럴 리 없어서지요 싹부터 시작된 집이 있다면 내가 원하지만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아요 싹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은 온종일 곁에 두면 서로 멍만 드니까요 문학동네, 2020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
한강이 없다 순식간에 끝나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놓친 손을 빠르게 다시 잡을 때 온기가 밝아진다 영혼은 빈 유리컵에 뱉은 담배연기 알 수 없어 뒤집어놓곤 한다 바뀐 신호를 따라 인파가 나를 밀어낸다 놓칠세라 어깨를 잡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경하다 믿어버린 녹슨 생각은 접어두고 펼치지 않았다 여기는 여기에 한가득 나를 채워두고 갈게요 올이 풀린 연기가 되어 커터칼을 뺐다가 넣다가 여전히 그을 수 없는 몸 어딘가처럼 편지도 구석부터 어두워졌다 저기는 저기에 없다 아직도 막차가 다닌다 아직은 보고싶지 않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창비, 2023
빗길에 착 달라붙은 나뭇잎들 보면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맞닥뜨린 느낌이 든다 꺼낼 수 없었던 어려운 말 그렇게라도 한번 짚고 넘어가길 바란 것일 텐데 허드슨강을 툭툭 끊으며 가던 적막한 유빙들 함께 떠가던 찬 주검들 이쪽 심장이 저쪽 심장에 부딪고 있었지 그런 춥고 검은 날 조금 더 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남을 수도 떠날 수도 없어서 이리저리 병을 옮기던 폐와 심장의 기근에서 흔적은 허약한 쪽에 새긴 비명들인 것을 우리 무사할 수 있을까 잘 가라앉을 수 있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미안해서 다른 말을 하기도 했다 젖어 선명한 모습은 제 웃음을 저 홀로 듣는 허무나 공포였을 테니 바닥에 착 붙어서 어디 닿을 곳 다시없어서 문학동네, 2020
장마가 끝난 하늘은 너무 맑아서 너무 멀리 온 것이 드러난 구름 감추어 둔 말을 들켜버린 저 한 줌의 옅은 구름 ​전하지 못한 말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흘러와 버렸구나 괄호 속에 혼잣말을 심고 꽃피지 못하는 말들에게 가시같은 안대를 씌워야 했구나. 차라리 폭풍의 지난밤이 견딜 만했겠다 천둥 소리로 가슴을 찢고 자진할 만했겠다 ​하지만 장마 갠 하늘에 흩어지지 못한 구름 한 점이여 숨을 데 없는 하늘에 들켜버린 마음이여 너무 넓은 고요를 흘러가다가 뒤를 돌아볼까봐 구름에게 나는 몇 마디 중얼거려본다 ​마지막 사흘을 퍼붓던 비가 그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면 이제는 페이지의 접혀 있던 귀를 펴야 할 때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그 문장들 아래 없는 밑줄도 이제는 지워야 할 때 문학..
여름은 늦고 줄기를 정리해야 하는 사람은 줄기를 정리하고 있다 여름이 늦으면 늦을수록 송이로 떨어지고 있다 송이가 한낮의 틈에 끼인다 어쩐지 조금 비켜나 있다 떨어졌어야 하는 곳에서 여름내 마르지 않고 불안과 초조와 조급함으로 지나온 계절로 돌아올 것이다 능소화 한낮의 틈새에 낀다 그대로 계절을 살아남는다 너의 기억보다 오래 너의 기억보다 큰 능소화가 창작과 비평, 2022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 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