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울 첼란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밤
내 노트북의 커서가 반짝일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가 바라보던 강물의 깊이와 그 강물이 흘러가 기르던 밤하늘의 화분에 담긴 별들을 생각한다
아무르 강을 내 오랜 기타처럼 연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슬픔은 검푸른 빛깔이어서 내 기타의 노래 소리 아득히 밤하늘의 별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슬픔들이 마르면 나무들의 영혼이 됨을 이제야 알겠다
목관악기의 가을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이제야 나는 조금 알겠다
자작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며 대지의 오랜친구들을 부를 때 삶은 현기증 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바람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의 위안 속에 잠길 수도 있다는 거, 이제사 알겠다
흠 있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이 지상의 거처,
흠 없는 영혼이란 없다!
슬픔이 흘러가 나무가 되고 나무들의 상처가 신생의 바람 앞에서 날것의 음악이 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밤
나는 지금 내 노트북의 반짝이는 커서를 보며 그대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대의 영혼이 별이 되었을 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농담처럼 고요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대는 별이 되지 말아라, 그 딱딱한 광물질의 세계에서 또다시 한 줌의 먼지로 빛나는 것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
차라리 생의 혹한의 시베리아로 오라, 와서 자작나무가 되라
하여 내 오래 들고 다니던 낡고 허름한 노트북 속에서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자작나무 기타로 환생하라
그대가 못다 이룬 음악을 내가 마저 이루니니
이 영혼의 릴레이를 훗날 사람들은 긴 노래라 할 것이다
하여 예니세이 강가에서 사람들은 자작나무 기타를 두드리며 우리가 만든 긴 노래를 부르리니, 지금 아시아의 한가운데서 모닥불처럼 피어나 하늘에 올라가 뭇별이 되는 사랑
우리들 영혼의 긴 횡단 열차의 밤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뿔,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