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275 Posts
전체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삶은 방금 첫 꽃송이를 터뜨린 목련나무 같은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아도 음악이 되는 황금의 시냇물 같은 것이었다 푸른 나비처럼 겁먹고 은사시나무 잎사귀 사이에 눈을 파묻었을 때 내 안에 이미 당도해 있는 새벽안개 같은 음성을 나는 들었다 그 안개 속으로 섬세한 악기처럼 떨며 내 삶의 비늘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곧 날이 저물었다 처음 세상에 온 별 하나가 그날 밤 가득 내 눈썹 한끝에 어린 꽃나무들을 데려다주었다 날마다 그 꽃나무들 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학과 지성사, 2010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 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 가진 목숨들의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기뻐하였습니..
쿨러안엔 한 마리 뱀이 살고있어 내벌름 허벌름 도사리는 서늘함 내뱉으며 먹이를 끌어댕기는 뱀이 치마가 짧은 어랜 새앙쥐 한 마리가 냉장고에 들어왔지 침을 꾸울떡 삼키고 아가리를 쫘아악 벌렸지 그런데 잽싸더군 대추알이랑 알로에를 빼내고는 눈치 챈 듯 냅다 달리더라고 그 꼴을 보니 뱀은 무얼 먹고 사나싶더군 쿨러 천장에 박힌 이슬이라도 마시는 걸까 그래서 먹이도 못 잡아먹는 정확한 코를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럼 저 움직이는 것이 먹이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을 마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이 여름 그 쿨러의 뱀은 쫄쫄 굶게 생겼군 안된 것 같으니 내가 그 놈의 먹이라도 되어 줄까 그 놈의 먹이라도 되어 나도 비틀비틀 비틀즈나 되어볼까
모기를 기록한다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슬퍼했으리라 가까이 봐야만 아픈 상처를 휴지로 닦아주고 나니 다리를 가지런히 포개어 마침표를 찍는다 흐려지는 흔적을 안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으리라 필름이 스친 자국을 남기며 모기는 스스로 기록되었다 봄과 여름 사이 날씨 어둠 그해 첫 철쭉이 노트위에 피었다 아무런 체취도 남기지 않은 체
순례라도 하듯 올라 온 산의 허리 바람을 맞이하였네 한 여름 할머니의 이마처럼 환하디 희게 핀 달맞이꽃 무리 노드리듯 불어 오던 나무 그늘 아래서 무를 무우라 말하던 시인의 시집을 보았네 둥그마한 흰 소의 꼬리에서 점 하나 피었네 흰 메아리가 돌아오던 땅속에서도 점 하나 피었네 시집을 들고 있던 손목의 간지럼, 점 하나 피었네 바람불어 간지러운 목 뒷덜미에서도 점 하나 피었네 생의 화려한 순간 추억하려 낙하한 곳이 마지막 계단처럼 아득한 그들에게 뿌리를 만들어주고 잎을 틔워주었네 그들 심장박동소리 깊숙히 울리었네 바람 불었네 그들은 무리지어 핀 달맞이 꽃 언저리께로 날아가 어렴풋이 화석이 되었네 바람 불어와 길이 저물었네 산 곳곳으로 달맞이꽃 피었네
kuzu vine [인간] 대전지역 의류업체 생산관리과의 낙하산 덩굴덩굴성 다년생 인간으로 몸의 길이는 177cm이며 입은 어긋나고 턱은 두 쪽 겹턱이다 지난 8월 8년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있는 빽 없는 빽 총동원하여 입사한 상태다 지금 막 졸업한 사회초년생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벨트 위 뱃살은 양 옆으로 7~8cm 두께로 길쭉하고 넓적한 모양으로 협과이다. 굵은 털 한 올 없는 허술한 머리체계는 어쩔 수 없고 12월이나 1월엔 없는 올마저 처량하게 서리를 맞는다 주로 보문산 기슭 양지빌라에서 자생하는데 서구 중구 유성구 대덕구 동구 등지에도 두루 분포하며 추위에도 강하지만 염분이 많은 생산공장에서도 잘 자란다 토요일 밤엔 대전 도심지나 서구 둔산동 등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히 드문..
그녀는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밤 어때요 나는 화려해 보이던데 하지만 늘 우울해 보이는 건 왜일까요 조용한 거리에 초점 잃고 흔들리는 가로등이 가끔은 애처로워 보일 때 가로등 켜진 길을 따라 가보면 언제든 나타나는 편의점들 긴 여름 밤 아니 따지고 보면 짧은 여름 밤 한 쪽 어깨를 달래기 위해 마셨던 캔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지는 시원-하게 마셔주고 한 대 꼬나물며 지나가는 사람들 정수리 보며 툭 내뱉는 말 어휴, 좋-을 때다 겨울로 가는 계절과 시간은 늘 좋을 때지 하지만 없는 건 이미 지나간 버스인거야 유행 지난 개그코드인거지 그래서 어쩔거야 어쩌긴 어째 어째하다 보면 째버리는 거지 째째해 보이겠지만 말야 hoot
누가 뒷목이나 탁! 쳐줬으면 좋겠다 TV 드라마 장면 속 낮술 취한 그니들처럼 그렇게 슬쩍 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는 뙤약볕처럼 엎어지고 싶었다 한 때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에서 누군가 갈피를 잡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신입을 구한다며 경력을 요구하는 현실을 비판한 적도 있다지만 이제는 흔한 진실 속 루머들처럼 머릿속에서 뒤 섞여 이제는 보지도 않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처럼 기억마저 각색되고 산산이 부서져 잊히는 요즘. 아이들은 언제나 좋아요 웃음과 함께 내뱉는 상스러운 욕들도 친근하죠 종종 싫은 아이들도 있어요 그렇다고 내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아이들인 걸요 품어줘야죠 그냥 학생이 아닌 우.리. 아이들인거잖아요 수업시간 보다 일과 중 쉬는 시간이 길어지기만을 원하는 우리의 아이들인 걸요 오늘 점심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