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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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활동 - 덕산 장날 학급캠핑 & 충주 나들이
화천 쉬는 날에서 샀던 시집. 왠만한 책만 파는 곳으로 가면 있던 박준 시집 말고 정말 우연하게 걸려든 시집인 것이다. 시간 내기 정말 어려운 기말주간이지만 그래도 이 한 권 잘 읽어주지~ ㅎㅎ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위 구역질난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지 밤에 내게 전화하는 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싫더라 주말에 약속 잡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정서적 난민 같아 주말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야지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 받기 곤란할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 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문학과 지성사, 2010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도립병원 철조망 아래 우리 집은 그 여름이 다 가도록 비에 잠기고 생각에 잠긴 지붕마저 선착장 유람선처럼 흘러가고 빚쟁이도 고지서도 쳐들어오지 않는 날들은 평화로웠네 비가 오면 조금씩 흘러가 마침내 주소마저 지워져버리는 우리 집 서쪽에는 항상 시청 철거반 합숙소가 있고 일요일 오후에 건빵 가져다주던 박 대위 아저씨 하숙이 있고 우리 큰누나 재봉틀에 매달려 일하던 모자 공장 그 건너 방죽에는 패랭이꽃 달맞이꽃 온갖 주인 없는 꽃들이 피어 갈 데 없는 마음들과 놀아주었네 백동전 서너 개만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소년중앙 별책 부록을 끼고 차창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는 도회의 유복한 소년처럼 한나절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했네 조치원역에서 내려 짜장면 한 그릇만 먹어봤..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러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