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24 Posts
● 쓰다
너는 노랑으로 시작해 초록이 되어가는 배경이다 노란 잎사귀에 남은 햇살 모이기 시작하면 고요했던 새벽도 이내 비워지고 콩밭 매던 뒷집 할매 이제 가고 없는 풍경 들녘에 짙게 부는 노랑에서 초록의 물결 그것은 공백에서 시작된 채움의 미학 초록은 주변과 물들기 시작해 각기 다른 색으로 번지는 특성이 있어 그늘의 이면이 드리우면 검버섯 같은 햇살의 무늬 돋아나기 시작한다 초록도 결국 노랑을 받아들일 수밖에 이것은 햇살인 것인지 지평선인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주름인 것인지 노랑은 결국 빛바랜 사진 앨범처럼 어쩌다 보아야 아름다운 장면이 된다 초록은 노랑으로 노랑은 추억으로 번지는 계절 우리는 그렇게 점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문득 아직 밤인 듯 아직 아침이 아닌 듯한 새벽, 눈 뜨자마자 가만히 앉아 새벽을 읽기 시작한다 온전히 고요하지 않은 새벽의 색깔은 지난 밤 얼룩처럼 물든 꿈속의 가장자리 새벽이라는 문장이 쓰이기 시작하면 나는 홀로 기이픈 창문 앞에 선다 어둠은 양옆으로 섰고 아침놀이 담쟁이 담을 따라 지난밤의 무늬로 스며들면 오로지 하늘은 어둠만으로 빛을 빚어낸다 밤이 울기 시작하면 내 맘은 이내 고요해지고 달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내 맘은 이내 선홍빛 머금은 노랑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차분하게 줄지어 핀 꽃송이들 바람에 흩날리지도 않고 아는 사람 없이도 빈자리 채워 올해도 제자리에 피워낸 계절의 흔적 노랑노랑 새살 피어나니 다시 쓰이기 시작한 문장으로 온 몸 설레는, 봄
벌써 꽃 다 지네 봄이 다 간 건 아니지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아쉬움으로 길 위에 새겨진 꽃의 줄무덤보다 더 깊은 아쉬움이 쌓이네 부끄러움으로 점찍은 노란 영춘화 피자 온 들 온 산 봄의 색으로 파도 쳐도 그 안에 나는 없네 봄 햇살 잔뜩 머금은 벚꽃나무 아래 웃으며 있고 싶었네 옆엔 누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집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말하며 배시시 웃어줄 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온통 눈부시네 올 봄은 너무 빨리 왔다 갔지만 봄꽃은 피고 지고 피며 끊임없이 흩날리네 지치지 않고 눈부시네 여름이 기대되는 이유이네
점점 검정으로 번지는 저녁 노을이라도 작은 도화지에 부지런히 담아보려 애쓰는 계단 위 사람들 저녁식사는 하고들 온 건지 아님 마치고 하려는 지 괜스레 궁금하지도 않은 것이 문득 궁금하던 찰나 고양이 한 마리 운동장 한 켠에 일 보고 돌아가다 눈 마주친다 발걸음이 멈칫 걸음도 멈추고 그림 그리던 연필도 호기심에 멈칫 시간이 멈춘 듯 건너편 집 창문에 비친 구름도 숨죽은 듯 멈칫 두 눈 깜 빡 이것은 믿음의 신호 인간이 하는 고양이 말에 놀란 듯 당황한 기색이 분명한 고양이의 눈동자 어떻게 해야하나 '안녕'이라 말하지만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쯤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멈칫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건조하고 영양분 하나 없이 모든 그림자 길에 새기듯 점점 검정으로 향하는 저녁 노을아래 적..
스트로베리 플레인 요거트 한 방울 떨어지듯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가 혼자 하는 사랑에 앓으며 방 안으로 깊어진다 ​연인에 취해 어둔 밤 속 내달리는 발걸음이 세레나데 되어 귓가를 파고드는 밤 어쩌면 아이의 눈동자를 따라 저 달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을 꿈꾸는 지 그토록 바라던 연인과의 발걸음 따라 어둔 밤을 끄적이며 달은 점점 시가 되고 있다 ​온갖 사랑도 모든 이별도 되새김질 하듯 그 밤 다 새도록 형광등 위로 내려앉고 있다 ​(교태를 부리듯 수줍게,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목소리로) 수줍게 웃는 ‘아, 이가’ 배시시 연신 분홍으로 빛난다 ​부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노트위에 써내려가던 단어들처럼 조심스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듯 사랑에 젖어든다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밤은 깊고 어두우니 아..
지금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나요 모텔과 모텔 사이로 하루 종일 서 있는 가로등이 보이는 이곳에선 비가 내리는 지 가는 지 오는 지 뛰고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낙엽들은 지쳐 쓰러지며 울고들 있다는 데 지금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나요 어제 밤에 빨아 넣었던 줄무늬 사각팬티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가슴 아프게 말라 죽어가는 가느다란 저 식물의 줄기들은 온종일 비를 기다리던데 그 좁은 땅은 그새 메말라 부슬부슬 모래가 씹힌다고 하던데 줄기들은 힘이 하나도 없이 잊혀 진 책장처럼 그 어느 곳에서 조차 잉크 냄샌 나질 않는다던데 책들이 그렇게 많았다면서요 너와 나의 이름이 적혀 있던 전화번호부며 그리고 당신의 졸업앨범이며 당신이 매년 들고 다녔던 그 새빨간 다이어리 음악 같은 눈이 내리는 격렬비열도..
너라는 그늘 나는 밤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은 애써 외면되던 허무한 바람의 뒤편 이토록 씁쓸했던 계절이 또 있었을까 너라는 그늘 복잡한 길 위의 겉면 껍데기 훌훌 벗고 집으로 향하다 너라는 나무 나는 낮 한 낮의 낯선 뒷면 타오르는 루드베키아의 향기는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지 나무의 그늘도 마찬가지 네 발가락까지 늘어지지도 못하지 언젠간 바닥으로 스며들 너는 허물 너라는 나무 너였던 건 이미 바람에 날려 가버리고 말았지 낮의 포효 치열하게 울리는 오후 2시라는 골목 점처럼 찍히던 한 잎 두 잎의 열기 담벼락 위로 타고 오르지 나무인 줄 알았던 풀의 냄새 풀풀 나 길 잃은 채 해매이던 나비의 날.갯.짓 너는 참 너라는 사람 나는 참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나는 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나는, 참 '청년문..
봄이 오네요 그이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창문을 닦아내니 어느덧 봄은 나에게로 쏟아지기 직전입니다 창문을 열고 휘파람을 불어요 밖으로 휘파람을 세 번 불면 시원하고 봄 내음 가득한 바람이 불어오죠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바람은 지나가는 문장처럼 읽어도 묻어나지 않아요 분명 볼을 타고 내게로 왔던 기억이 있거든요 가끔은 꿈일 거라 생각했지만 꿈도 가끔은 생각나지 않는 나이다보니 읽었던 문장을 또 읽듯 왔던 봄바람을 그리워하며 여름바람을 맞이하기도 해요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아파하지 않을 거라서요 봄을 만끽할겁니다 어차피 금방 또 잊을 거니까요 * 이제니 中 계간 '인간과 문학' 2022, 여름호
아침에 일어나 오래도록 바라본 천장을 매트삼아 한바탕 눈으로만 요가를 해도 아무도 모르는 일 ​아침밥은 이것이 지청구인지 토끼풀인지 쇠고들빼기인지 모를 풀을 똑 똑 모가지만 따 쫑쫑 쓸어 찬밥에 고추장 참기름 쓱쓱 비벼 먹어도 되는 일 ​아무것도 심지 않은 텃밭에서 민들레 이파리 뜯어 찬물에 담가놓고 살짝 데쳐 된장 조금 들기름 조금 으깬 마늘 조금 조물조물 먹어도 되는 ​따스한 햇볕 들어 나무 아래 그림자 채워지면 그제야 옹기종기 모이시는 동네 할머니들과 농담을 밥 먹듯 먹으며 한바탕 웃어도 좋을 일 ​들고양이가 레오라도 되는 듯 뛰놀던 밀림이 아니라 뒤꼍에서 ‘얘들도 분명 이름이 있을 텐데 미안’을 되뇌며 흙색으로 바래버린 목장갑에 생을 마감하는 풀들을 정리하느라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그..
꽃가지 울컥, 쏟아지는 봄 그렇게 잊혀져 보려고요 오늘은 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날입니다
수줍은 걸 어떡해요 부끄럽잖아요 어떻게 그걸 해요 에이, 안 돼요 싫단 말이에요 배시시 부는 바람에 샛노란 꽃잎 흔들거리고 난 못해요 그런 건 내가 아니라 나에게 오는 사람이 해주는 거죠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지금처럼 처음처럼 수줍게 얌전히 피어 있을게요. *이라 쓰고 맞선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계간 '인간과 문학' 2023 봄호
아픔 없이 맺히는 것 없듯 슬픔 없이 헤어지는 봄도 없어 가지의 피부를 뚫고 나오느라 꽃잎은 얼마나 아팠을까 파도에 짓이기면서도 바다는 얼마나 울었을까 누가 살고 있을지도 모를 담 밑에 주저앉아 일찍 지워지듯 가버린 할머니 생각에 골목의 어둠속으로 울음 토해내던 아버지 생각에 어둠은 얼마나 깊고도 안쓰러웠을까 베갯잇 바래는 줄도 모르고 흘린 눈물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밟히고 밟혀 바다의 품으로 스며들던 해변가 모래의 상처들 순서 없이 떨어지던 봄 꽃이 만들어낸 길 위의 생채기들 파도 위로 차츰 스미며 바삐 오가던 머릿 속 많은 입술들 그럼에도 봄 벌써부터 그리워질 너 계간 '인간과 문학' 202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