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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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시인
★★★★★ 수업을 위해 다시 읽어 본 시집. 박정대시인의 청춘에 격렬비열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면 나의 청춘엔 박정대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나는 혼자만 생각한다 ㅎ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문장을 읽는 맛을 알게 되었고, 대학 시절 시창작 교수님으로부터 알게 된 박정대로 하여금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문장들을 읽었다. 그중 단연 압권은 이겠지만 박정대 박정대 시인의 , , 등등 솔직히 박정대 시인의 시집은 왠만하면 다 괜찮은 문장들이 많다. 가끔 배가 아파야 할때, 원고마감일이 다가올 때, 오늘 밤은 시를 안 쓰고는 못 베길 거 같을 때 꼭 읽는 시집이다. 다시금 시를 써야할 시기가 다가오므로 나는 수업을 핑계 삼아 이 시집을 다시 선택했다. 좋은 시는 못 쓸 수도 있겠지만 맛있는 문장을 담은 시..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아..
- 파울 첼란에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밤 내 노트북의 커서가 반짝일 때 나는 그대를 생각한다 그대가 바라보던 강물의 깊이와 그 강물이 흘러가 기르던 밤하늘의 화분에 담긴 별들을 생각한다 아무르 강을 내 오랜 기타처럼 연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슬픔은 검푸른 빛깔이어서 내 기타의 노래 소리 아득히 밤하늘의 별들로 이어질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슬픔들이 마르면 나무들의 영혼이 됨을 이제야 알겠다 목관악기의 가을을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이제야 나는 조금 알겠다 자작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며 대지의 오랜친구들을 부를 때 삶은 현기증 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바람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의 위안 속에 잠길 수도 있다는 거, 이제사 알겠다 흠 있는 영혼들이 거주하는 이 지상의 거처, 흠 없는 영혼..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 이하(李賀)의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철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단편들' 세계사, 1997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는 아침에 나는 가까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푸른 맨발을 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침의 가깝고도 먼 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여 너는 지난밤 무거운 공기들의 외투를 벗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나고 있구나 정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너를 드러내 보이는 이 순결한 아침의 햇살 속에서 사월의 투명한 대기는 참혹한 기쁨에 옴몸을 떨고 나의 불면은 아무 것도 노래할 수 없구나 그리고 내오랜 그리움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흙들의 사랑은 함부로 꽃들을 피워올리고 있다 보이는 곳의 사랑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구나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깊은 사랑을 하는 온갖 나무들이여 저마다의 격렬한 희망을 표명하며 흘러가는 오 짐승이여 강물이여 너희들이 흘러가서는 마치 최초의 기쁨으로 스며드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