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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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철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단편들' 세계사, 1997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하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