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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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최근에 읽은 시집 중 가장 배가 아프게 만든 시인이다. 다음 시집이 너무나도 기다려지는 시인이기도 하고 나왔다면 바로 사 읽고 싶어지는 시인이기도 하다. 원래는 예전에 한 번 읽긴 했었는데... 출판되자 마자... 이번에 수업을 위해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그리고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한 편 한편 이렇게 문장이 맛있는 시집은 흔치 않다. 보통은 시집을 엮기 위해서 몇 십편의 시를 선택하다보면 몇 편은 아쉽기 마련이거나 약간 급하게 쓴 티가 나는 시집들이 같이 묶이기 십상인데 이 책은 아쉬운 문장을 가진 시가 단 하나도 없다. 시를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시집이다.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약간 고민을 하게 만드는 시가 있긴 해도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완벽 그 자체다. 오랜만에 ..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 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볼 때 그녀가 싫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아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볼 때면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는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끊어지는 것들을 꿰고는 했다 미동 없이 한참을 꿰다가 잠에 들어가던 그녀가 말했다 지금 들리는 음악이 좋아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가 싫었다 꼭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으니까 잠에 든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방 한칸이야 더는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짙고도 푸른 작은 방 * 쳇 베이커의 노래.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창비, 2022
나이지리아에서 왔어 나이는 몰라 사장님이 그러는데 내가 한국에 온 지 삼십 년 됐대 아빠는 부인이 다섯이야 엄마는 둘째 부인이나 셋째 부인일 거야 나한테 뽀뽀를 잘 해줬어 근데 난 넷째 부인을 닮은 것 같아 일 끝나면 공장사람들은 다들 고향 얘기를 해 그럴 때면 나도 고향에 가고 싶어 하지만 잘 모르겠어 혼자 가만히 있을 때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아 고향을 생각하면 이상해 내가 아는 고향과 진짜 고향이 다르면 어떡해? 내가 아는 바로 그 고향에 갔는데 기쁘지 않으면 어떡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젊고 어리고 나만 혼자 늙었을지도 몰라 난 멀리 와서 매일 일을 해 이젠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아졌을 거야 고향에는 일자리가 없어 사람들은 낮에도 자거나 술을 마셔 가족을 괴롭히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