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때때로 쓰고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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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철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단편들' 세계사, 1997
잠들 수도 없고 잠들지 않을 수도 없는 아침에 나는 가까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푸른 맨발을 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침의 가깝고도 먼 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여 너는 지난밤 무거운 공기들의 외투를 벗고 눈부신 알몸으로 빛나고 있구나 정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너를 드러내 보이는 이 순결한 아침의 햇살 속에서 사월의 투명한 대기는 참혹한 기쁨에 옴몸을 떨고 나의 불면은 아무 것도 노래할 수 없구나 그리고 내오랜 그리움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흙들의 사랑은 함부로 꽃들을 피워올리고 있다 보이는 곳의 사랑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구나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깊은 사랑을 하는 온갖 나무들이여 저마다의 격렬한 희망을 표명하며 흘러가는 오 짐승이여 강물이여 너희들이 흘러가서는 마치 최초의 기쁨으로 스며드는 오,..